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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은 그의 코미디적인 기질에다, 비록 말만으로 흉내를 내는 수준일지라도 동서양을 넘나드는 학문이력이 더해져 그의 강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의 열혈 팬들의 사랑이 그의 학문적인 업적의 진실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물론 보통 우리들은 인간을 평가할 때 언행을 보긴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은 오히려 기인에 가깝기 때문에 그 부분은 그냥 건너 뛰기로 하자. 왜냐하면 그런 곁가지에 매달리다 보면 우리의 평가가 자칫 초점을 벗어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가 도덕경을 해석할 때는 말(언어)보다는 글자(문자)에 충실해야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말(소리글)이 아니라 글자 자체가 뜻을 나타내는 뜻글자로 써져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헷갈려 하는 경향이 있다. 일단 글자의 의미를 중심으로 해석하게 되면 많은 도덕경을 해설하는 사람들의 말장난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 한편으론 이 부분을 분명히 해둬야만이 다음 구절(名可名非常名)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도올선생의 강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可를 영어의 'can be'의 의미로 '할 수 있다'의 개념이라고 꿰어 맞춘다. 이로부터 그는 글자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을 만천하에 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바로 말하면 可는 '옳다'는 의미이며, 이는 밑에 숨어 있는 하나님이 올라 오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神)이 옳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할 수 있다'는 개념이 공존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는 노자가 극단적으로 언어를 부정했다고 외친다. 그의 이런 착각은 바로 非자를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벌어진 불행한 사건이다. 이 非자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진짜와 가짜가 양쪽으로 공존하고 있다. 이는 숫자로 치면 일곱부터 아홉까지의 과정으로, 넷부터 여섯까지의 잘못됨을 치유하는 구원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구원의 과정은 당연히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부정적인 개념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한자, 常의 주체는 숨어 있는 하나님이다. 그는 구원의 과정에서 항상 구원을 하러 나온다. 이 글자를 설명하면서 동양사상에서는 영원불변이라는 것이 없다고 떼를 써본다. 왜 영원불변이 없는가? 바로 道가 영원불변의 진리인데도, 道를 이야기하면서 영원불변이 없다고 궤변을 늘어 놓는다.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주역의 영향이 컷던 듯하다. 그래서 '道可道非常道'를 "도를 도라고 할 수 있다면, 그 도라고 말하여진 도는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다."라고 설명을 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what can be said at all can be said clearly, and what we cannot talk about we must pass over in silence."이 바로 도올에게 들려 주고 싶은 말이다. 침묵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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